
나는 종종 특별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리에서 튀거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빛나고 소중한 삶을 사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특별하다는 단어로 표현할 뿐이다.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은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당연한 생각이 아닌가 싶었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대중이 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당신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런 나를 타박하는 것 같았다. 까불지말고 묵묵하게,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고 하는 듯 했다.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그런내용이 아니라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은, 특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스스로 특별해지고 싶지만 내심 나는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소위 ‘긁히는’ 마음이 들어서 오해를 한 것 같다.
밑줄 친 문장들
영화 속 저커버그는 자신의 지적 우월감을 무기 삼아 타인을 깎아내리며, 주변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난 그저 솔직하게 말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한다. 자신의 솔직함이 남들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는 솔직함을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무례를 솔직함으로 포장하며, 마치 그것이 미덕인 양 행동한다. 66p.
내가 종종 쓰는 화법이라서 찔리는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이라고 해서 그걸 누군가에게 나불거릴 수 있는 권리까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맞는 말이라도 뱉지 않는 것이 더 성숙한 대화이며, 남들이 멍청하기에 그런 말을 뱉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 때도 많다. 더 성숙한 누군가는 다 알고 있음에도 상황에 따라 그 말을 참을텐데, 그들이 보기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꼴불견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며 완벽한 작품을 만들려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가장 완벽하게 ‘미완성된’ 작품 인지도 모른다. 디자인의 혁신이 때로는 규칙을 깨는 데서 시작되듯, 삶의 진정한 순간들도 계획된 픽셀 사이의 여백에서 피어난다. 삶의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정렬된 그 격자 바깥에 있다. 67p.
소영 씨와 상담을 진행하며 알게 된 건, 그녀 내면에는 “정확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라는 말이 삶을 지배했다는 점이었다. 보통은 어릴 적 부모의 압박, 혹은 가정 환경에 따라 이러한 강박을 갖게 되지만, 그녀에게는 특별한 외부 환경의 요인은 없었다. 그저 스스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채찍질하는 완벽주의자로 성장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실수와 그 책임을 전부 자신의 탓으로 돌린 나머지, 모든 것에서 정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자신의 책임이 그나마 줄어든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116p
우리의 삶은 결코 완벽한 알고리즘으로 계산할 수 없다.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이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든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종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지만, 역설적으로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를 찾기도 한다. 122p
나는 자신에게 꽤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편이다. 책에 나오는 내담자의 사례처럼, 꽤 오랫동안 자신을 몰아세우며 완벽주의를 추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나는 타인에게 그 엄격함을 들이밀고 싶을 때가 많았기에, 나를 엄격하게 대함으로써 마치 그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그런 자격이 생기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엄격함을 세상에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런 동기로 나를 채찍질 하는 것은 아주 잠깐동안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기도하지만,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지도 않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 빅터프랭클은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의 부재다” 라고 말했다. 민수의 죽음 이후, 진호 씨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들이 떠난 것보다 그를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민수와 함께 꿈꾸었던 미래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78p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얻은 깨달음,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마지막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진호 씨는 이제 조금씩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실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을. 82p
정보의 격차와 경험의 차이,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자와 이용당하는 자, 우리가 ‘공정한 경쟁’이라 부르는 것의 실체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136p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내가 밑줄쳤던 문장이다. 프랭클은 그 가혹한 환경에서조차, 그 가혹함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태도만큼은 결코 빼앗을 수 없다고 했다. 어쩌면 그 태도는 우리가 마지막까지 빼앗길 한 가지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뿐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공정한 척 하지만 사실은 불공정하며,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럴것이다. 태도 따위가 중요하지 않을만큼 공정한 유토피아가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런 세상이 무조건 좋은 방향인지도 모르겠다.
인간관계에서는 떄로 가면이 필요하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면이 너무 단단히 자리 잡으면, 우리는 결국 자신을 잃고 만다. 더 무서운 것은 타인에게도 관심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수진이 동료들에게 그러했듯이, 우리는 상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기보다는 적당한 대답만 건네고,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기보다는 피상적인 대답으로 대신하려 한다. (중략..) 수진에게 “네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곧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고발과도 같았다. 98p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그 취향을 드러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적이 많다. 하지만 색채 없는 사람은 미움받지 않을 수는 있으나, 전혀 매력적이지도 않고 가까워지기도 힘들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이론과 개념이 무너진다”고 했다. 이메일 발신자 ‘알렉스 백’, 전화 너머의 ‘백 대표’, 그리고 아침마다 엘리베이터에서 스치던 ‘7층 남자’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192p
직업특성상 데이터로 사람을 접할 일이 많다. 화면에 보이는 숫자로 사람을 대할 때면, 가끔은 이 숫자들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 기계처럼 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숫자 뒤에 있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니 컴퓨터처럼 논리로만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할 때, 홍보부스에 나가거나 대면 인터뷰를 하는 걸 좋아한다. 그 숫자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 할 때, 다시 한 번 그 화면 속의 숫자들이 마음을 다해 소통해야하는 사람임을 상기한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병원, 요양원, 장례식장이라는 격리된 공간에 가두어 두고, ‘평화롭게 떠났다’는 표현으로 죽음의 실체를 부드럽게 포장한다. 이러한 미화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기 위한 사회적 방어기제다. 하지만 죽음은 평화롭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병마와의 싸움, 미완의 꿈,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 뒤섞인 복잡한 과정이다. 204p
우리는 자신을 포함해 가까운 사람의 생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 그것을 꺠달았을 때 비로소 삶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생의 끝인 죽음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 불안과 불행감, 타인과의 거리 모두 심리적 수용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217p
죽음과 출생은 모두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각자 분리된 개체로 살아가지만, 성적 결합이나 죽음의 순간에는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그는 이를 ‘존재의 연속성’이라 불렀다. 다시래기 의식에서 죽음과 출산이 공존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라는 지혜를 담고 있다. 236p.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라는 말 속에,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니 당신도 죽는다. 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종종 ‘전 특별하게 살고 싶지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마치 영생을 누릴 사람 처럼 사는 것을 많이본다. 소수가 아니라,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물론 ‘너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그들은 ‘당연히 알지요.‘라고 대답하겠지만, 그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배경에는 이 사회의 몫도 크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입에 담기 싫고 생각하기도 싫은 그 죽음을, 마치 대소변을 화장실 변기에서 물을 내려 처리하듯 해결하고 깔끔하게 격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생리현상의 악취를 일상에서 격리시키는 화장실의 역할처럼, 현 시대는 죽음마저 기능적으로 삶에서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한 구조다. 어느 요양병원, 장례식장에 그 무거움을 몰아넣고 3일동안 약속된 절차 속에서 슬픔을 소화하고 ‘편안하게 가셨습니다’라는 깔끔한 포장지까지 덧붙여준다. 하지만 많은 죽음은 대부분 편안하다라는 포장지보다는 훨씬 복합적이다. 치열하고, 그립고, 비극적이기도 하고, 불가사의하기도 하고, 극적으로 분노하며 저항하는 죽음도 있다.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책 제목을 좋아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매일 아침 그 죽음의 무거움에 짓눌려 살라는 것이 아니다. 밥상에서 화장실 이야기를 하지 않듯, 일상에서 그 부정적 에너지를 담아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매일 화장실에 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깔끔하고 단정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듯이, 죽음을 생각해야만 우리가 결코 특별하지 않음을, 그렇기에 오늘도 소중한 하루를 만끽해야함을, 매일 아침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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