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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s second brain 탐색
9 to 6 · 1 / 4화

정원철

8 min read

“여러분,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마이크를 들면 정원철의 목소리는 한 톤 낮아졌다. 객석이 조용해지기를 한 박자 기다렸다가, 그는 답을 줬다.

“자기는 안 당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웃음이 적당한 타이밍에 터졌다. 정원철은 그 타이밍을 좋아했다. 강당에 임직원 100여 명을 앉혀 놓고 두 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는 자리. 1년에 두 번 돌아오는 보안 교육이었고, 12년째 그가 직접 강의했다. 농담 끝에는 늘 같은 당부를 붙였다.

“사고가 났을 때 그걸 숨기는 사람이, 사고보다 위험합니다. 보안에서 가장 큰 구멍은 언제나 사람이고, 그 사람의 자존심입니다.”

12년 동안 수백 번 한 말이었다. 자기가 그 말의 예외라고 믿으면서.

그날 아침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9시 10분에 도착해, 아메리카노를 사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두 사람의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정원철이 모니터를 켜자마자 박준영이 다가왔다. 입사 6개월 차 IT팀 신입이었다.

“선배님, 그 키보드 어디 거예요?”

정원철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리얼포스.”

“축은요?”

“삼십 그램.”

“역시.” 박준영이 휴대폰에 뭔가를 적었다.

정원철이 그제야 돌아봤다. “그걸 왜 적어.”

“사려고요. 선배님 쓰시는 거랑 똑같이.”

“마우스도 똑같이 살 거야?”

“이미 샀는데요.” 박준영이 웃었다. 자랑이었다.

키보드만이 아니었다. 박준영은 정원철의 모니터 배경화면이 회색 단색이라는 걸 어디서 보고는 자기 것도 회색으로 바꿨고, 강의에서 정원철이 한 말은 노트에 빼곡히 적어 두고 가끔 외워서 읊었다.

“선배님은 진짜 기본이 다르세요.”

그런 말을 진심으로 했다. 정원철은 그 숭배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솔직히 싫지 않았다. 누군가 자기를 그렇게까지 본다는 건, 자기가 그만한 사람이라는 뜻 같았다.

“선배님, 저 이제 일하러 가볼게요.”

박준영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원철은 메일함을 열었다. 밤사이 쌓인 메일 40통을 휠로 훑었다. 그러다 한 메일에서 손이 멈췄다.

발신인은 김영석 전무. 제목은 이러했다. [긴급/대외비] 외부 침해 사고 대응 건 — 즉시 송금 협조 요청.

정원철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메일은 짧고 단호했다. 어젯밤 외부 침해 정황이 포착됐고, 외부 대응 업체에 긴급 의뢰가 들어갔고, 업체는 착수금 선지급 조건이며, 정식 결재는 이틀이 걸려 늦다고 했다. 비공개 진행 필수. 정 차장이 본인 계좌에서 우선 3천만 원을 송금해 두면 다음 주 안에 회수해 주겠다고 했다. 하단에 계좌번호와 예금주가 있었다. 예금주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업체명이었다. 보안솔루션컨설팅.

위화감이 없지 않았다. 개인 송금이 끼어드는 건 온당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나 김 전무는 평소에도 정식 라인보다 빠른 결정을 좋아했고, 정원철에게 직접 일을 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진짜 외부 침해라면 시간이 곧 손실이었다. 게다가 메일 중간에 한 줄이 있었다. 이 건은 정 차장만 믿고 맡깁니다.

정원철은 그 한 줄에서 멈췄다.

3천만 원은 그의 비상금이었다. 아내가 모르는 돈. 몇 년에 걸쳐 한 달에 얼마씩, 티 안 나게 빼돌려 모은 돈이었다. 큰 욕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만 아는 돈이 통장에 하나쯤 있다는 사실이 숨통 같았다. 겉으로 그의 삶은 견고해 보였지만, 그 모든 게 사실은 얇은 껍데기이고, 그 안을 받치는 건 누구도 모르는 이 돈 하나뿐인 것 같다고 가끔 느꼈다.

그러나 회수된다고 했고, 무엇보다 회사 일이었다. 정원철은 인터넷뱅킹을 켜고 계좌번호를 옮겨 적었다. 송금 버튼을 누르기 전, 손끝이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나 누른 것은 그 머뭇거림보다 빨랐다.

송금 완료.

회사에 뭔가 기여한 기분이 잠깐 들었다 사라졌다. 그는 일을 마저 끝내려고 메신저를 켰다. 메일로 보고했지만 직접 한 번 더 확인해 두는 게 그의 스타일이었다.

정 차장: 전무님, 메일 받았습니다. 방금 3천만 원 송금 완료했습니다. 분석 진행되는 대로 공유 부탁드립니다.

읽음으로 바뀌기까지 40초가 걸렸다.

김 전무: ? 무슨 송금이요?

정원철은 화면을 오래 봤다. 키보드 위에 올린 손이 그제야 차가워졌다.

메일함으로 돌아가 발신자 주소를 펼쳤다. 표시 이름은 김영석 전무. 그러나 실제 주소는 회사 도메인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 글자가 달랐다. 그가 1년에 두 번 강의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사칭 메일이었다.

인터넷뱅킹을 다시 열었다. 3천만 원은 그 시각에 그 계좌로 빠져나가 있었다. 이미 그의 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빠져나간 직후 몇 시간이 골든타임. 지금 신고하고 지급정지를 걸면 돈이 남아 있는 한 일부, 어쩌면 전부를 묶을 수 있었다. 정원철은 강의에서 이 골든타임을 백 번도 넘게 설명했다. 1분이 곧 돈입니다, 라고.

그러니까 답은 명확했다. 지금 당장 신고하면 된다. 다만 신고하려면, 자기가 사칭 메일에 속아 3천만 원을 보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경찰에, 은행에, 회사에. 12년간 전설로 통하던 정원철이, 자기가 강의에서 제일 먼저 보여주는 그 메일에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그날부터 그는 강단에 설 수 없게 된다.

시계는 9시 30분이었다.

오전 10시, 보안팀 정기 미팅이 있었다. 정원철이 진행하는 자리였다. 안건을 절반쯤 넘겼을 때, 회의실 한쪽 모니터에 IT 모니터링팀 공지가 떴다. 오전 9시 15분경 사내 단말에서 임원 사칭 추정 메일에 대한 외부 도메인 접속 감지. 해당자 즉시 신고 요망.

회의실이 슬쩍 웅성거렸다.

“또 누가 당했나 보네요.”

누가 웃으며 말했고, 몇이 따라 웃었다.

“요즘 그런 메일 많더라고요. 진짜 정교해요.”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정원철도 웃었다. 진행자였으니 한마디는 보태야 했다.

“끝나고 봅시다. 누군지는 로그 보면 나오니까.”

“하긴 차장님 손에 걸리면 바로 나오죠.”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정원철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그 누군지가 자기였다.

미팅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로그 시스템을 열었다. 자기 접속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9시 15분, 외부 도메인 접속. 그 옆에는 비슷한 시간대에 외부 도메인에 접속한 다른 직원들의 기록도 있었다. 마케팅팀 김미정 대리. 영업팀 이종현 부장.

손가락 몇 번이면 됐다. 자기 기록을 흐리고, 저들 중 하나를 도드라지게 만들면. 외부 접속 로그는 그가 신입 시절부터 손봐 온 시스템에 남았고, 어디를 어떻게 만지면 흔적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안 걸릴 자신이 있었다. 정확히는, 안 걸릴 능력이 있었다.

마우스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었다. 시계는 10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선배님, 잠깐 괜찮으세요?”

박준영이었다. 노트북을 안고, 평소처럼 약간 들뜬 얼굴로. 정원철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노트북을 펼쳤다.

“아침 그 사칭 메일 건, 제가 한번 분석해 봤는데요.”

화면에는 정원철이 평소 가르친 그대로의 분석이 정리되어 있었다. 접속 시간대, 도메인 패턴, 의심 계정 후보. 빈틈이 없었다.

“선배님이 강의에서 말씀하신 절차대로 해봤어요. 골든타임 지나기 전에 해당자부터 찾아서 지급정지 걸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최대한 빨리 추려봤어요. 시간대 겹치는 계정이 셋인데, 패턴 보면 이 중 하나예요.”

정원철은 그 화면을 봤다. 박준영의 분석은 정확했다. 정확해서,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결국 그 자신에게 도달할 분석이었다. 박준영은 아직 거기까지 가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정원철이 자기 기록을 흐리고 김 대리 쪽을 도드라지게 만들면, 박준영은 그 조작된 데이터를 그대로 믿을 것이다. 선배가 가르친 절차를, 선배가 손본 시스템을, 선배 그 자체를 의심할 이유가 박준영에게는 없었다.

그게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 정도면 선배님 방식대로 한 거 맞죠?”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선배가 가르친 그대로 했으니 맞을 거라고 이미 믿는, 칭찬을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정원철은 그 눈빛을 한참 봤다.

“이건 사안이 민감하니까 내가 직접 본다.”

“아, 네.” 박준영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노트북을 두고 물러났다. “하긴 선배님 사건이니 직접 처리하시는 게 맞죠.”

선배가 직접 보겠다는데 더 나설 이유가 없었다. 박준영은 가벼운 얼굴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혼자 남았다.

정원철은 로그 시스템을 다시 열었다. 자기가 신입 시절부터 손봐 온 시스템이었다. 자기 계정의 접속 기록을 찾아, 그것을 지웠다. 9시 15분의 외부 도메인 접속. 그 한 줄을 지우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건을 시스템 오탐으로 정리했다. 외부 메일 한 통이 차단 필터에 정상적으로 걸렸을 뿐, 실제 클릭이나 접속은 없었던 것으로. 보고서는 깔끔했다. 그가 직접 작성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12년 동안 후배들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가르친 일이었다. 기록을 손대는 것. 사고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 보안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무엇이냐고 강의에서 물으면 그는 늘 같은 답을 했다. 사고가 아니라 은폐라고. 그는 방금 그 답을 자기 손으로 실행했다. 3천만 원을 포기하는 대신, 평생 옳다고 믿어 온 단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돈도 잃고 원칙도 잃었지만, 적어도 아무도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스템을 닫았다. 자기는 거기까지는 안 가는 사람이라고. 누구에게도 누명을 씌우지는 않았다고.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사흘 뒤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소식을, 박준영이 가져왔다.

“선배님! 그 사칭 메일 건 말인데요.”

박준영이 환한 얼굴로 자리에 왔다.

“종결된 줄 알았는데, 경찰에서 협조 요청이 왔더라고요. 그 사기 계좌가 다른 데서도 신고가 들어가서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대요.”

정원철은 천천히 돌아봤다. ”……그래서.”

“그래서 제가 로그를 다시 봤거든요. 근데 이번엔 딱 한 명이 뜨더라고요. 마케팅팀 김미정 대리님이요. 시간대도 맞고, 외부 접속 기록도 깨끗하게 남아 있고.”

“깨끗하게.”

“네. 처음엔 셋이었는데, 다시 보니까 정리가 딱 됐어요. 신기하게.” 박준영은 그게 신기한 줄만 알았다. “그래서 바로 계좌 역추적해서 지급정지 걸었어요. 남아 있던 돈 일부는 피해자들한테 환급 처리되고요.”

”……환급.”

“네, 명단에 회사 관련된 분도 있던데. 아무튼 골든타임 지나기 전에 묶었으니까, 선배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됐죠.” 박준영이 웃었다. “1분이 곧 돈이다, 그거요.”

정원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흘 뒤, 그의 통장에 3천만 원이 그대로 돌아왔다. 그가 골든타임에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한 그 일을, 박준영이 김미정 대리를 쫓는 과정에서 대신 해낸 것이다. 돈이 돌아왔다. 인생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대가로, 김미정 대리가 임원 사칭 메일을 클릭해 보안 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원철은 자기가 김 대리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다. 자기는 그저 자기 기록을 지웠을 뿐이고, 김 대리 쪽으로 의심을 돌리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자기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었다. 그 변명을 머릿속에서 몇 번 굴려 봤다. 굴릴수록 얄팍해졌다. 직접 민 것과,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도 손을 내밀지 않은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김미정 대리는 결국 가벼운 주의를 받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보안 교육 한 번 더 이수, 사내 시스템에 주의 이력 한 줄. 정원철은 그 사실에 안도하는 자기를 보며, 안도한다는 것 자체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김 대리가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은, 결국 자기가 입을 닫아도 될 명분을 하나 더 얻은 것이었다.

며칠 뒤, 박준영이 또 환한 얼굴로 왔다.

“선배님, 저 자리 새로 세팅했는데 한번 봐주세요.”

박준영의 자리는 정원철의 자리와 거의 똑같았다. 같은 키보드, 같은 마우스, 회색 단색 배경화면. 책상 위에는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사고를 숨기는 사람이 사고보다 위험하다.

“이 말이 제일 멋있더라고요.” 박준영이 메모지를 가리켰다. “보안을 한 문장으로 찌르는 것 같아서. 이번 건 처리하면서 계속 생각났어요.”

“그래?”

“네. 만약에 누가 그걸 숨겼으면, 그 김 대리님도 못 찾고 돈도 못 묶었을 거 아니에요. 숨기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거, 이번에 진짜 느꼈어요.”

정원철은 그 메모지를 잠깐 봤다.

“잘 적었네.”

박준영은 흐뭇한 얼굴로 돌아갔다. 자기가 떠받드는 사람이 며칠 전 정확히 그 문장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는 걸, 박준영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정원철이 끝까지 안 걸렸기 때문이다.

다음 보안 교육은 두 달 뒤였다. 정원철은 늘 하던 대로 강당에 섰고, 늘 하던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러다 그 농담을 할 차례가 왔다.

“여러분,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멈췄다. 객석은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그 다음 문장을 알고 있었다. 12년 동안 수백 번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문장이, 그날따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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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bitch가 되고 싶은 마시마로 2026. 06. 29. 23:09

    bad 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