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호기심이다. AI는 호기심이 없다. 만약 AI가 호기심이 생기고 스스로 질문을 할 줄 안다면, AI는 사랑도 할 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을 가진 AI’의 단초는 다름아닌 ‘스스로 떠올리는 질문’이다. ㄴ 연산, 기억 능력들을 기계에게 대체당하던 인간은 마침내 AI의 등장으로 문제해결 능력조차 빼앗겼다. 마치 알파고가 바둑이라는 초 고차원 문제해결 능력을 정복해버렸듯, 아직까지 AI가 미숙한 고차원적인 이 세상의 문제들도 머지 않아 점령당할 것이다.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AI가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느냐/아니냐 는 성능과 시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믿었던 것에 한 발짝 진입을 허용하면, 정복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기술의 성장 속도는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다.
점차 기계에게 빼앗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능력은 ‘질문하는 능력’이다. 이제 질문을 잘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질문하는 능력이 부족한 축에 속한다. 급속한 발전으로 우리는 오지선다형 객관식 문제를 빠르게 푸는 것을 평생에 걸쳐 훈련했고, 정답이 몇번인지 찾는 것 이외에 그 문제에 숨겨진 사소한 질문들을 떠올리는 것은 사치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군부독재를 기반으로 초고속 성장을 거치는 동안 큰 흐름에 반하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었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 끝에 이 나라 사람들은 질문하는 능력이 거의 거세되었다고 봐도 좋다.
특히 질문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부끄러움이다. 속된말로 쪽팔림이다. 한국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할 사람은 손을 들라고하면 조용히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찾아가 개인적으로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 공개적으로 질문하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AI의 등장 이후 질문의 부끄러움이 사라졌다. Chat GPT에게 질문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고, 내 질문이 얼마나 멍청한지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ChatGPT 구독 아이디를 공유할 때, 나의 질문 컨텍스트가 공유되는 것 떄문에 망설이다가 결국 따로 구독을 결제했던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질문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AI 때문에 질문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능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뒤늦게나마 질문하는 능력을 가장 잘 훈련할 수 있는 도구도 AI이다. 우리는 쫓아가야할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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