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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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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표지|160

책 이야기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서 출판되었다. 많은 이들이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것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큰 이유라고 꼽는다.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식물 백과사전 같은 내용이 들어있을 것 같은 제목으로는 인기를 끌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은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할 뿐만 아니라, <상실’과 ‘시대> 라는 있어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기가 막힌 마케팅을 이루어냈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더 책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최근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목으로 다시 출판된 책이 표지가 훨씬 예뻐서 마음에 든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 기즈키와 그의 여자친구인 나오코와 자주 시간을 보낸다. 와타나베에게는 기즈키가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기즈키가 다리 역할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다. 그런데 어느 날 기즈키가 자살한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살하는 걸 깜빡잊었다가 생각난 것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각자의 삶을 살다가 대학생이 된 후 우연히 재회하고 친분을 이어나간다.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내면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고, 나오코의 상처를 위로해주다가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그 날 이후 나오코의 심적 고통은 더욱 심해져서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시골의 요양원으로 떠나버리게 된다.

도쿄에 홀로 남겨져 대학 생활을 계속하던 와타나베는 같은 수업을 듣는 미도리라는 여자와 친해지게 된다. 미도리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와타나베에게 끌려서 적극적으로 그에게 대시하고 집에 초대해서 같이 시간을 보낸다. 한편 와타나베는 나오코에게 편지를 받고 요양소로 초대받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요양소에서 그녀의 룸메이트인 레이코를 만난다. 레이코는 요양소에 오랫동안 있었던 중년 여성 환자로, 나오코가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레이코는 과거에 열세살 동성애자 여자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다가 여자아이의 의도적인 접근으로 원치 않는 성적 접촉을 하게 된다. 그 때문에 레이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퍼져서 레이코는 큰 상처를 안고 요양원에 들어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 레이코와 한방에서 지내며 친해진다.

도쿄로 돌아온 와타나베는 미도리와는 교제를 하면서도 나오코와는 계속 편지를 주고받는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그리워하면서도 미도리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한다. 얼마 후에 나오코가 요양원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레이코로부터 듣게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이 소식을 듣고 레이코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책을 읽고

와타나베는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과 관계를 가지고, 게다가 묘사가 매우 디테일해서 야설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 자극적인 내용이 있는 책이 당시에 인기를 끌었다는 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성적 욕망 또한 청춘이 가장 강렬하게 마주하는 요소 중에 하나이다. 이를 거침없이 표현했기 떄문에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공감대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 책의 주제를 꼽으라면 ‘무엇이든 불안하고 공허한 청춘, 방황하는 자아’ 에 대한 이야기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라는 말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학이 있을까 싶다. 이 책은 발매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책을 나는 머리로 이해하며 읽었지만, 조금 더 어렸을 때 읽었더라면 가슴으로 느끼며 읽었을 것 같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숲 中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으며 성장한다. 젊은이의 성장이란 그런 게 아닐까. 단어로만 알던 개념들을 직접 부딪치고 겪어가며 그 절절함을 학습해 나가는 것. 와타나베가 느낀 죽음도 그런 시련이었을 것이다.

_그게 아냐.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를 바라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투정을 마음껏 부리는 거야. 완벽한 투정. 이를테면 지금 내가 너한테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싶다고 해. 그러면 넌 모든 걸 내팽개치고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헉헉 숨을 헐떡이며 돌아와 ‘자, 미도리, 딸기 쇼트케이크’ 하고 내밀어. 그러면 내가 ‘흥 이제 이딴 건 먹고 싶지도 않아.’ 라며 그것을 창밖으로 집어 던져 버려.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런거야.어떤 사람들한텐 사랑이란 그렇게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데서 시작되는 거야. 그런게 없으면 시작되지가 않아. 노르웨이의 숲 中에서

미도리도 와타나베처럼 방황하는 청춘이다. 생기 넘치고 직설적이며 주관이 확고하다. 이런 미도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청춘들은 각자 ‘사랑’에 대한 개념도 다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면서 느끼고 다시 재정의하며 탄탄해진다. 미도리의 이런 ‘사랑’에 대한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다. 유튜브에서 노르웨이의 숲 영화에 이 장면이 나온 클립이 있어서 봤는데, 내가 책을 보며 상상하던 장면이랑 흡사해서 좋았다.

▶ 상실의 시대 미도리 - 노르웨이의 숲 영화 (2010)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어디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획 둘러보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와타나베는 기즈키와 나오코를 잃고, 레이코와도 하룻밤을 보낸 뒤 떠나보냈다. 그에게 남은사람은 미도리 뿐이다. 그리고 지금 어디에 있냐는 물음에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와타나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지금 자신이 인생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루키의 소설은 유난히 다른 문학작품, 음악에 대한 언급이 많다. 와타나베는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이나 읽고, 레이코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기타로 연주한다. 하루키의 또 다른 소설 <1Q84>에서도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 대한 오마주가 있었고, 야나체크의 교향곡 <신포니에타>가 자주 등장했다. 하루키의 이런 방식은 소설에 마치 영화 OST를 삽입한 듯한 효과가 있어서 글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나도 이 책을 읽을 때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었는데, 책의 분위기를 공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재미있었다. 하루키의 글을 처음 읽는 사람들, 혹은 이미 읽었던 사람일지라도 책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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