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틸은 《제로 투 원》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중요한 진실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떠오른 생각 하나를 적어본다.
대한민국은 IT 강국이 아니다.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증거들
이 주장에 반박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근거가 많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속도. OECD 상위권의 스마트폰 보급률. 삼성전자는 세계 1위 스마트폰 제조사이자 메모리 반도체 강자다. 네이버는 구글이 전 세계를 장악하던 시절에 한국 시장을 지켜낸 거의 유일한 로컬 검색 엔진이다. 카카오톡은 국민 메신저를 넘어 금융, 모빌리티, 콘텐츠까지 확장했다. 게임 분야에서는 크래프톤의 배틀그라운드가 글로벌 시장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
숫자도, 사례도, 이야기도 있다. “IT 강국”이라는 말이 틀렸다고 하기 어려운 이유들이다.
그런데 이 증거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질문이 생긴다.
”IT 강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빠른 인터넷 속도는 소프트웨어 실력의 결과가 아니다. 한국은 영토가 좁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광케이블을 깔기에 이보다 유리한 조건이 없다. 인프라 구축 비용이 낮았을 뿐이다. 광케이블 깔기 좋은 나라와 소프트웨어를 잘 만드는 나라는 조금 다른 이야기다.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세계 1위가 된 건 고도화된 설계 능력 덕분이라기보다, 수율 관리와 생산 능력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소프트웨어적 사고라기보다 제조업적 사고에 가깝다. 실제로 한국 경제를 이끈 건 현대자동차, 포스코, 조선업 같은 제조업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제조업의 성공을 IT의 성공으로 읽어온 건 아닐까.
네이버의 성공 방식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네이버가 구글보다 검색 기술이 뛰어나서 살아남은 건 아니다. 카페, 블로그, 지식iN으로 한국어 콘텐츠를 플랫폼 안에 축적하는 전략을 택했다. 기술 경쟁보다는 콘텐츠 생태계를 먼저 구축한 것이다. 영리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 구조가 오래 유지될수록, 글로벌 표준과 맞붙어야 할 이유는 점점 줄어들었다.
개발자로 일하면서 이 차이를 체감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해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직접 뜯어보고 오픈소스에 기여하거나 영어로 글을 쓰는 흐름이 자연스럽다. 국내에서는 같은 기술이 번역되어 소개되고, ‘어떻게 쓰는가’로 빠르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만드는 것보다 쓰는 것에 더 익숙한 생태계다. 어느 쪽이 낫다는 게 아니라, 그 차이가 쌓이면 어디로 이어지는지가 궁금해진다.
빠른 팔로워 전략의 유효기간
사실 한국의 성장 방식은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선두 주자가 길을 열면, 빠르게 따라가서 실행력으로 승부하는 것. 제조업에서도, IT 인프라에서도, 내수 플랫폼에서도 이 전략은 잘 작동했다.
문제는 이 전략이 ‘표준을 따라가는 것’이 가능할 때만 유효하다는 점이다. 표준이 명확하고 목적지가 보일 때, 빠른 팔로워는 강하다. 하지만 표준 자체가 흔들리거나, 아직 아무도 정답을 모를 때는 다른 이야기가 된다.
AI는 후자다. 지금 전 세계가 동시에 같은 안개 속에 서 있다. 따라갈 표준이 아직 없다. 이 국면에서 빠른 팔로워 전략은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갈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근육을 한 번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는 게 지금 한국의 진짜 문제일 수 있다.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삼성은 2010년 바다(Bada) OS를 자체 개발해 스마트폰에 탑재했지만, 앱 생태계를 키우지 못한 채 3년 만에 접었다. 뒤이어 타이젠(Tizen)으로 다시 도전했지만 스마트워치에서조차 결국 구글의 Wear OS로 회귀했다. 티맥스는 윈도우를 대체하겠다며 자체 OS 개발을 선언했다가, 완성되지도 않은 제품을 발표 무대에서 시연하다 멈춰버리는 장면을 남겼다. 이 시도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 싸움이 얼마나 다른 종류의 싸움인지를 실감하지 못한 채 시작했다는 것이다. 빠른 팔로워의 실행력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진짜 IT 강국은 어디인가
비교 대상을 잠깐 보면 이 이야기가 더 선명해진다.
이스라엘은 인구 약 950만 명의 나라다. 그런데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기술기업은 135개로, 미국·캐나다·중국에 이어 세계 4위다. 인구 100만 명당 유니콘 창업자 수는 세계 1위이고, 유니콘 기업 수는 25개 — 인구가 5배 많은 한국(14개)보다 많다. 체크포인트, 먼데이닷컴 같은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이 작은 나라에서 나왔다.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만 명의 나라지만 스카이프가 탄생했고, 국가 디지털 인프라를 소프트웨어로 직접 설계했다.
공통점이 있다. 내수 시장이 작아서 처음부터 글로벌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경쟁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쟁하는 법을 익혔다. 한국은 반대 조건이었다. 내수 시장이 충분히 컸고, 그래서 글로벌로 나갈 이유가 없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그 결과로 글로벌 표준과 싸우는 근육을 키울 기회를 놓쳤다.
뿌리가 없으면 꽃도 없다
이 문제는 기업의 전략에만 있지 않다. 더 깊은 곳에 있다.
한국은 R&D 투자 규모 세계 5위 국가다. 그런데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0명이다. 이 간극이 단순한 불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R&D 투자의 75%는 기업이 주도한다. 기업 R&D는 본질적으로 상업적 성과를 향한다. 당장 제품이 되지 않는 기초연구, 10년 뒤에나 쓸모가 생길 수 있는 물리학·화학 연구는 뒤로 밀린다.
인재의 흐름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과학고와 영재학교는 이공계 핵심 인재를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다. 그런데 이 학교 졸업생들의 의대 진학률은 재수생까지 포함하면 공대 진학률을 넘는다. 국가가 이공계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투자한 교육이, 정작 그 인재들을 이공계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탓할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개인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결과다. 문제는 그 선택을 만들어낸 구조에 있다.
AI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기술이 아니다. 수십 년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시절에도 묵묵히 기초연구를 이어간 사람들의 산물이다. 제프리 힌턴이 딥러닝 연구를 시작했을 때 세상은 관심이 없었다. 성과가 보이지 않는 연구에 오랫동안 투자한 생태계가 있었기에 지금의 AI가 있다. 실효성이 검증된 뒤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는 방식으로는 그 출발점에 설 수 없다. 꽃이 핀 것을 보고 씨앗을 심는 격이다.
중국은 어떻게 달랐는가
한국보다 늦게 인터넷을 시작한 나라가 있다. 중국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은 미국이 가장 경계하는 기술 경쟁자가 됐다.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중국도 초기엔 빠른 팔로워였다. 바이두는 구글을, 알리바바는 아마존을, 위챗은 WhatsApp을 참고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수 시장을 발판 삼아 규모를 키운 뒤, 그 규모로 기술에 재투자했다. 알리바바는 클라우드 인프라를 직접 개발했고, 바이두는 검색을 넘어 자율주행과 AI 반도체로 확장했다. 모방에서 시작했지만 모방으로 끝내지 않았다.
인재 전략도 달랐다. 중국은 현재 연간 5만 명 이상의 STEM 박사를 배출한다. 2025년 기준으로 미국의 약 두 배다. 의대 쏠림과 이공계 기피가 구조화된 한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인재를 쌓아왔다.
결과는 숫자로 나타난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격차는 현재 2.1년으로, 2년 전 2.9년에서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2025년 초 중국의 AI 스타트업 딥시크(DeepSeek)가 미국 최고 수준의 AI 모델과 견줄 만한 성능을 훨씬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냈을 때, 실리콘밸리의 투자자 마크 앤드리슨은 이를 “AI 분야의 스푸트니크 모멘트”라고 불렀다. 중국이 단순 추격자가 아님을 세계가 실감한 순간이었다.
중국이 모든 면에서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뜻이 아니다. 국가 주도 전략의 그늘도 분명히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중국 내수 시장의 안락함에 안주하지 않았고, 모방을 출발점으로만 삼았으며, 기초 역량에 장기적으로 투자했다. 그 차이가 지금의 거리를 만들었다.
AI 시대, 우리는 어디서 출발하는가
요즘 AI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우리가 AI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IT에서는 앞서 있었는데 AI라는 새로운 분야에서만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이 글에서 쭉 이야기해온 것처럼, 소프트웨어를 원천적으로 만들고 표준을 정의하는 싸움에서 우리가 앞선 적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물어야 할 것 같다. AI에서만 뒤처진 게 아니라, 그 싸움에 한 번도 본격적으로 뛰어든 적이 없었다면 AI도 그 연장선일 뿐이다.
이 인식의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IT 강국인데 AI만 못 쫓아가고 있다”는 출발점과 “우리는 처음부터 도전자였다”는 출발점은 전혀 다른 전략을 만들어낸다. 전자는 따라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하고, 후자는 다르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어쩌면 지금이 그 질문을 제대로 던지기 가장 좋은 타이밍일 수 있다. AI는 기존 소프트웨어 강자들의 기득권을 흔들고 있고, 판이 다시 열리고 있다. 강국의 자부심보다 도전자의 자세가 오히려 지금에 더 맞는 태도일지 모른다.
댓글 (1)
같은 질문에서 이렇게 정리된 글이 나오는 게 너무 신기합니다... 재밌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