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추
식탁 위에 마카가 색깔별로 놓여 있었다. 그녀는 다음 주 수업 자료를 펼쳐놓고 있었다. 활동지, 시각자료, 동선이 그려진 종이 한 장.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마카를 색깔별로 정리하고, 활동지를 인원수보다 두 장 더 복사해두는 것까지. 십수 년 동안 한 일이었다.
거실에서는 두 아이가 놀고 있었다. 큰애 서윤이는 색종이를 접고 있었고, 작은애 서아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작은 단추 하나를 들고 식탁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엄마, 이거 봐.”
“응.”
시선을 들지 않았다. 다음 주 수업은 1학년이었다. 1학년은 동선이 가장 까다로웠다. 줄을 세 번 정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아가 단추를 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색종이를 접고 있던 서윤이에게 갔다.
“언니, 이거 봐, 이거이거.”
“응 예뻐.”
“언니, 이거 어디서 났는지 알아?”
”……”
“언니.”
“서아야.”
서윤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묻어났다. 그녀는 그 짜증의 결을 알았다. 자기 일에 몰입해 있을 때 누군가가 자꾸 끼어드는 그 결.
“그거 보는 시간 아니야. 언니 이거 해야 돼.”
손이 멈췄다. 자료 위에 마카를 든 채로, 그녀는 그 문장을 들었다.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그거 보는 시간 아니야. 토씨 하나 안 틀린 본인의 말이었다. 본인이 수업에서 수십 번, 수백 번 했던 그 말. 어느 토끼풀 군락 앞에서도 했던 그 말.
고개를 들었다. 서윤이는 다시 색종이로 돌아가 있었다. 서아는 단추를 손에 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칭얼거리지도 않았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뭐라고 말하려다가, 안 했다. 자료로 시선을 내렸다. 같은 줄을 세 번 읽었다. 글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2. 책
며칠이 흘렀다. 그녀는 평소처럼 수업을 다녀왔고, 평소처럼 보고서를 썼고, 평소처럼 다음 학교 일정을 확인했다. 한 가지만 달랐다. 집에서 서윤이가 서아에게 말하는 걸 의식하게 되었다. 보려고 본 게 아니라, 한번 본 게 자꾸 보였다.
화요일 저녁, 서아가 베란다 화분 옆에 쪼그려 앉아 뭔가를 보고 있을 때, 서윤이가 와서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와, 다음 거 해야지.”
수요일 아침 등원길, 서아가 보도블록 사이의 뭔가에 또 쪼그려 앉았다. 서윤이가 옆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거 말고 빨리 와.”
목요일 밤, 자기 전에 서아가 책을 한 권 들고 왔다. 작은 동물들이 나오는 그림책이었다. 이거 읽어줘. 서윤이가 책장에서 다른 책을 꺼내왔다.
“그거 어제도 읽었잖아. 이거 새 거 읽자.”
서윤이가 새 책을 서아의 손에 쥐여주었다. 서아가 들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부엌 식탁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떨어진 책을 보았다. 서아가 그 책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서윤이가 쥐여준 책을 받아들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언제부터였지. 처음으로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서윤이가 저렇게 말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지. 답을 알았다. 답을 알아서 더 답이 나오지 않았다.
3. 솔방울
토요일이었다. 그녀는 그날 마침 쉬는 날이었다. 모처럼 두 아이를 데리고 동네 공원에 나가기로 했다. 평범한 산책이었다. 특별한 활동도, 정해진 동선도 없었다.
나가기 전에 서아가 자기 가방에 뭘 넣고 있었다. 어제 어디서 주워온 솔방울이었다. 평소 같으면 _그건 집에 두고 가_가 자동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날도 그 문장이 입까지 올라왔다. 입까지 올라왔는데, 그 직전에 손이 멈췄다. 자기 손이 왜 멈췄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어떤 감각이 손끝에 잠깐 스쳤다. 무언가를 구겼던 감각.
“그래, 가져가.”
서아가 환하게 웃었다.
4. 풀
공원은 한적했다. 서윤이가 앞장서서 걸었다. 또래보다 키가 큰 아이였고, 늘 동생을 챙기는 아이였고, 늘 엄마를 도와주는 아이였다.
서아는 자꾸 뒤처졌다. 한 걸음 걷다가 멈추고, 두 걸음 걷다가 또 멈췄다. 풀을 보았고, 돌멩이를 만졌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번은 개미가 줄지어 가는 걸 한참 들여다보았다. 한번은 꽃잎이 떨어져 있는 곳에 쪼그려 앉았다.
평소 같으면 _서아야, 빨리 와_가 자동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 문장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본인도 본인이 왜 안 내는지 정확히는 몰랐다. 그저 안 했다.
서윤이가 그걸 알아챘다. 엄마가 동생을 재촉하지 않는 것을. 서윤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멈춰섰다. 엄마를 한 번 보고, 동생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다가갔다.
“서아야.”
서윤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동생을 사랑하는 언니의 목소리, 엄마를 도와주려는 큰딸의 목소리였다.
“엄마 기다리시잖아. 다음 거 봐야지. 그거는 다음에 와서 또 보면 되잖아.”
발이 멈췄다.
다음에 와서 또 보면 되잖아.
그녀는 본인의 문장을 나를 닮은 목소리로 전해 듣는 묘한 기괴함을 느꼈다. 어느 학교의 어느 마당에서, 토끼풀을 끝까지 만지작 거리던 어떤 아이에게,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사실은 다음이 없다는 걸 알면서 했던 말. 그 수업은 그 회차로 끝이었고, 그녀는 다음 학교로 갈 거였고, 그 아이가 그 토끼풀 군락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였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다음에 와서 또 보면 되잖아. 그게 프로다운 가장 깔끔한 마무리였으니까.
지금 그 문장을 서윤이의 입으로부터 들었다. 일곱 살짜리가, 본인이 학습한 가장 어른스러운 말투로,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해. 서윤이는 잘못한 게 없었다. 그저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닮을 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갔다. 서윤이는 엄마가 자기를 칭찬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엄마를 도와줬으니까. 동생을 잘 다뤘으니까. 평소에 엄마가 그렇게 했으니까. 서윤이 옆을 지나쳤다. 머리를 짧게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그대로 지나쳐서 서아에게 갔다. 서아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봤어?”
서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작은 풀 하나였다. 이름 모를 풀이었다. 토끼풀도 아니었고, 네잎클로버도 아니었다. 그녀는 오래 풀을 봐온 사람이었다. 풀 이름이라면 도감을 펼치지 않고도 백 가지는 댈 수 있었다. 그 풀의 이름도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았는데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5. 점
“엄마, 여기 이 풀에 점 있어. 점이 세 개.”
서아가 잎사귀의 한쪽을 가리켰다.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정말 점이 세 개 있었다. 작은 갈색 점. 벌레가 알을 낳은 자리인지, 병이 든 자리인지, 아니면 그냥 그 풀이 원래 가진 무늬인지 — 그녀는 몰랐다. 그 풀의 그 점을 처음 보았다.
“진짜네. 세 개네.”
“이쪽에도 있어. 봐봐. 여기는 두 개.”
“두 개네.”
“이거는 왜 그래?”
”……엄마도 몰라.”
서아가 올려다보았다. 엄마가 모른다는 말을 처음 들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잎사귀로 시선을 돌렸다. 손가락으로 그 점을 톡톡 짚어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엄마.”
“응?”
“엄마도 얼굴에 점 세 개 있잖아.”
서아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켰다. 왼쪽 광대 옆, 거울을 볼 때 늘 흘낏 보고 지나치던 자리. 점이 세 개 있었다. 본인도 잊고 사는 점이었다.
“얘는 엄마 풀이네.”
서아가 다시 풀을 보았다. 잎사귀의 점을 보고, 엄마 얼굴의 점을 보고, 다시 잎사귀를 보았다.
“나는 얘가 좋아.”
바람이 한 번 풀잎을 흔들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이미 다음 말을 잇고 있었다. 풀잎이 부드럽다는 둥, 점이 어떻게 생긴 것 같다는 둥, 자기 손가락보다 작다는 둥. 작은 입에서 작은 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 말들을 다 듣지 못했다. 나는 얘가 좋아.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멈춰서 다른 문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서아는 매일 무언가를 좋아해왔다. 단추를, 솔방울을, 보도블록 사이의 무언가를, 베란다 화분 옆의 무언가를. 그때마다 그녀는 _그거 보는 시간 아니야_라고 했고, 서윤이는 그걸 학습했고, 서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서아가 좋아한 모든 것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 풀, 엄마 단추, 엄마 솔방울. 아이는 매번 엄마를 가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윤이가 뒤에서 어색하게 서 있었다. 본인이 뭘 잘못했나 싶은 표정으로. 동생을 잘 다뤘는데 엄마가 자기 옆을 그냥 지나가버려서, 자기가 뭘 모르고 있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손을 뒤로 뻗었다.
“서윤이도 와서 봐봐. 엄마 풀이래.”
서윤이가 망설였다. 그러다가 천천히 다가와서, 동생 반대편에 쪼그려 앉았다. 셋이 함께 그 풀을 보았다. 한참을 보았다. 서아가 점 위치를 하나하나 짚어주었고, 서윤이가 어, 진짜네 하고 작게 말했다. 그러다가 서윤이가 자기 손등을 들여다보더니, _나는 점 없는데_라고 중얼거렸다. 서아가 _언니 풀은 따로 있을 거야_라고 했다.
아무도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해가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누군가 멀리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무릎이 저렸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는 순간 또 *자, 이제—*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다. 무릎이 저린 채로. 서아의 손가락이 잎사귀에서 다른 잎사귀로 옮겨갔다. 그녀는 그 손가락을 따라갔다.
밤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거실에 혼자 나왔다. 식탁 위에 다음 주 수업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활동지, 시각자료, 동선. 마카 색깔별로 정리된 것까지 그대로였다. 그것을 한참 보았다. 내일 아침이면 이걸 가방에 넣어야 했다. 모레 수업이 있었다. 1학년이었다. 빙고 활동이 있었고, 시각자료 보여주는 시간이 있었고, 마무리 활동이 있었다. 분 단위로 정해진 동선이 있었다.
자료를 덮지 않았다. 고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펼쳐둔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대 앞에 잠시 섰다. 거울 속 얼굴을 보았다. 왼쪽 광대 옆의 점 세 개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본인 손가락이 본인 얼굴에 닿는 감각이 낯설었다.
거실 불을 껐다. 자료 위로 어둠이 내렸다. 그녀는 그 어둠 속의 식탁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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