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글을 쓸 때는 고쳐 쓰고 다듬는 과정이 있다. 어떤 말을 꺼낼지, 어디까지 드러낼지 — 키보드 앞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편집이 들어간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질문을 받고 즉흥적으로 대답하다 보니, 오히려 내가 몰랐던 내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날것 그대로를 남기고 싶었다.
나와 인연이 있는 개발자 전문 헤드헌팅 회사의 대표님께서 “Experience Day”라는 이름으로 커리어 경험을 공유하는 소규모 세션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세션에서 일일 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토크쇼처럼 질문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별도로 자료를 준비하지 않은 채 사회자의 질문에 즉흥적으로 답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커리어, 그리고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번 회고는 그날 나눴던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는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
Q. 다양한 도메인에서 커리어를 경험하셨는데, 보통 다음 방향에 대한 기회 탐색을 어떤 식으로 하시는 편인가요?
A. 보통 다음 방향을 고민할 땐 제가 현재 상황에 어떠한 결핍을 느끼고 있을 때입니다. 그 결핍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합니다.
Q. 결핍이라는 키워드가 흥미롭습니다. 그렇다면 커리어 방향성을 바꿨던 자세한 이야기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A. 첫 직장인 제가 다녔던 통신사를 들어갈 때는 대학생 때 가지고 있던 결핍이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해본 ‘Hello World’ 코딩보다는 고등학생 때부터 쭉 공부하고 익숙했던 수학이나 물리 공식을 다루는 것에 훨씬 더 자신감을 느꼈습니다. 관성처럼 직장에서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전기전자와 통신공학 수업을 훔쳐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Hybrid 엔지니어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첫 직장이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부분들도 있었습니다만, 어느샌가 “1등 마인드를 배우고 싶다”라는 결핍이 생겼습니다. 제가 다녔던 통신사는 3위 사업자이기도 했고, 통신업이라는 도메인 자체가 내수시장에 집중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고민하지는 않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Winning Mind, 1등 DNA를 가진 회사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기업으로 이직을 결심했고, 컴퓨터를 전공하고 통신사를 다녔던 제게 모바일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모바일 사업은 글로벌 1위를 하는 사업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자신있게 글로벌 1위라고 말할 수 있고, 앞으로도 1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반도체 사업부로 이직을 했습니다.
대기업에서 반도체 설계 일을 하면서 제 결핍은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커리어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일하기도 했어요. 정말로 글로벌 1위를 지향할 때 마주하는 치열한 고민들도 함께하며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SSD 제품을 만드는 일도 했고요.
하지만 모든 업무가 익숙해질 무렵 또다시 결핍이 생겼습니다.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을 ‘더’ 잘하게 만드는 일을 반복하는 속성의 일에 동기부여를 많이 얻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는, 아직 미성숙한 도메인을 찾아다녔습니다.
인공지능이나 블록체인 등 떠오르는 기술들이 있었는데, 당시에 블록체인 관련 철학에 흥미를 느껴서 블록체인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게 되었어요. 제 인생의 큰 변곡점이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블록체인 업계에서 일하면서 사회에서 블록체인이라는 키워드를 바라보는 좋지 않은 시선들 때문에 많은 피로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코인 발행 따위는 해본 적도 없고, 단지 열심히 기술 연구에 매진할 뿐이었는데 코인 가격의 등락만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하는 일을 설명하는 것도 좀 피곤했고요. 어느샌가 내가 사기꾼이 아니며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 순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까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런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단지 당시에 사회적으로 문제되었던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선한 일을 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단지 대의를 위해 봉사활동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헬스케어/의료 관련 프로덕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Q. 경험하셨던 많은 도메인 중에 가장 배우기 어려웠던 건 무엇이었나요?
A.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눠서 볼 수 있겠습니다.
가장 난해했던 것은 블록체인이었습니다. 블록체인은 단순히 차세대 기술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면 정확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합의 알고리즘 같은 지엽적인 부분에 꽂혀서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금융, 철학, 인문학 등 일반적으로 엔지니어가 다루지 않는 영역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수하게 ‘어려운’ 분야는 지금 있는 헬스케어/의료 업계입니다. 이 도메인은 제가 배경지식이 부족한 영역이기도 하고, 어떠한 건강정보는 이라는 키워드는 제가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 아무리 노력해도 100%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에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 인터뷰 등을 통해서 간접적이더라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Q. 생소한 기술도 빠르게 배우고 적응할 수 있는 본인만의 꿀팁이나 노하우가 있나요?
A. ‘엔지니어링’의 근본은 하나이고 결코 다르지 않다는 믿음입니다. 근본적인 것에 집중하면 나머지 부수적인 것들은 결국 익숙해질 수 있는 스킬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특정 개발 언어를 잘하는 것에 가치를 크게 두지는 않습니다. 개발 언어는 트렌드나 시대의 이해관계에 맞춰서 언제나 바뀔 수 있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Q. 앞으로도 기술적인 지식을 넓게 배워가는 것을 기대하시나요? 아니면 이제는 지금의 도메인에 정착해서 좀 더 깊게 파보는 방향을 생각하시나요?
A. 기술적인 지식에 포커스를 맞추진 않습니다. 제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기술이 필요하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익힐 뿐이에요.
지금은 새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도메인 기술에 집중하고 있어요. 아직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재미있습니다.
업무 외적으로 단지 ‘기술적인 지식’을 넓게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억지로 다양한 기술을 경험하는 표면적을 넓혀서 생각의 폭을 넓히려고 해요. 예를 들어서 애플 비전프로 같은 제품도 이번 주에 시착해보려고 예약을 잡았습니다. 쓸데없이 비싼 제품이지만, 국내에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도 모두가 ‘신기하지만 쓸데없이 비싼 얼리어답터용 제품’이라고 했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기술들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 입장에서 IT 발전에 기여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이 세상에 나의 흔적 남기기’라는 비전을 갖고 계시던데, 이런 도메인 전환이 어디에 흔적을 남길지 찾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어떤 흔적들을 남기셨다고 생각하시나요?
A. 지금까지는 제가 희망하는 명확한 흔적을 남기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흔적이냐’라고 고민했을 때,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 좀 과격한 표현으로는 내가 죽더라도 — 제가 생산한 결과물이 이 지구에서 살아 숨쉬며 제 정신을 이어받아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비트코인을 만든 나카모토 사토시의 정확한 정체를 아무도 모르고 그가 생존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지만, 그가 만든 코드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고 좋든 나쁘든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요.
물론 제가 대기업에서 반도체 설계 일을 하며 만들었던 SSD 제품들도 전 세계 사람들의 컴퓨터에서 동작하며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기여도나 영향력, 지속가능성 관점에서 제 기대치는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전환한 도메인에서는 좀 더 확실한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소프트웨어를 다루다가 좀 더 확실하게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며 흔적을 남기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유저의 건강관리를 도움으로서 어떠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남기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생명을 남기는 것보다 이 세상에 명확하고 지속가능한 흔적을 남기는 일이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지금 있는 도메인에 열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Q. 독후감 블로그도 쓰실 만큼 책을 좋아하시던데,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책, 혹은 추천해주실 만한 책이 있나요?
A.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책은 제가 직접 쓰고 출판한 에세이 책입니다. 제가 가장 힘들고 방황했던 시절 썼던 책이고, 제 밑바닥을 토해낸다는 심정으로 쓴 책이기 때문에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책이에요. 하지만 부끄럽기 때문에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제가 절판시켰기 때문에 동네 책방 구석 말고는 찾기도 힘들 거에요. 제 비전이라고 말씀드렸던 ‘이 세상에 흔적 남기기’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출판을 하면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책을 보내라고 연락이 옵니다. 싸이월드가 망하면 제 기록이 사라지지만, 국립 중앙도서관은 대한민국이 망하기 전까지는 제 기록을 아카이빙 해줄 것입니다.
추천해드릴 만한 책은 After Steve라는 책입니다. 애플 CEO 팀 쿡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에요.
이 자리에 개발자 분들이 많으시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IT 스타트업 붐이 생긴 시작점에 스티브 잡스가 발표한 아이폰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플을 세계 시총 1위 IT기업으로 만든 건 잡스가 아니라 팀 쿡입니다. 흔히 “잡스는 세상을 바꿨지만, 팀 쿡은 애플을 바꿨다”라고 평할 정도로 팀 쿡 이전과 이후의 애플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창업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신데, 너무나 뛰어난 창업자의 그늘에 가려진 2대 CEO의 고뇌도 생각해보실 수 있습니다. 팀 쿡은 매번 잡스와 비교당하지만 이미 잡스보다 뛰어난 업적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업적을 다룬 책의 제목조차 After Steve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서조차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증명해나가고 있는 점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지만 한 번쯤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세션에서 “이 세상에 흔적 남기기”를 비전으로 말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 글도 그 흔적의 하나다. 발표 자료도, 녹화 영상도 남지 않는 자리였지만 — 적어도 내가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여기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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